몬테로쏘
몬테로쏘
기원전 177년: 로마군이 한니발군대를 격퇴시킴, 리구리아원주민과 그의 동맹은 삼늄족(중부이탈리아)영토로 추방됨. 전설에 의하면 칭궤테레는 승자인 로마제국 귀족(Rubra,Vulnetia, Cornelia)들에게 전리품으로 넘겨졌다함
기원전 1세기
몬테로쏘 근처에 있는 알베레토에 초기 거주지가 생겼다고함, 19세기 소비오레성당(Santuario di Soviore)근처에 있는 고대로마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이 증명함
기원후 629년
랑고바르드족 Rothari왕이 리구리아 침략, 알베레토와 소비오레마을을 약탈. 주민들은 바다에 있는 산크리스토포로 성으로 피신했는데 이 성이 있던자리가 몬테로쏘의 기원이 되었고 이곳의 토양 색이 적색이라 몬테로쏘라 부르게됨
1056년 2월 27일
후작 Guido degli Obertenghi가 봉토를 수여함: "Monte Russo(후에 몬테로쏘)"를 언급한 기록이 발견됨
1307년
13세기부터 짓기 시작한 산 조반니 바티스타 성당완성. 주민들 계곡으로 주거지를 옮기기 시작했으며 이곳이 몬테로쏘 시가지가됨
1815년
제노바공화국이 사르데냐왕국에 합병. 칭궤테레는 지리적으로 격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함
1874년
제노바 - 라스페지아 연결하는 철도완성으로 수 세기 동안 계속되던 오지상태에서 벗어남
1997년
유네스코는 몬테로쏘를 포함한 칭궤테레의 다섯 마을이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
베르나짜
기원전 177년- 한니발과의 전쟁종결
로마군이 한니발격퇴. 리구리아원주민과 동맹군은 삼늄족영토로 추방됨. 전설에 의하면 승자인 로마제국 귀족(Rubra,Vulnetia, Cornelia)들에게 전리품으로 넘겨졌다고함
1000년
레조교회근처에 살던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 일부는 내륙으로 옮겼고 나머지 주민은 해안에 정착했는데 이들이 베르나짜의 조상들임
1050년 2월 29일
베르나짜라는 이름이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한 해
1254년
피에스키가문은 사라센해적 피해를 막기위해 요새를 건설
1276년
제노바공화국에서 베르나짜를 구입함.
그 당시 최강의 적 피사군에 맞서싸우기 위해 전투선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항구를 건설하고 근처에 조선소를 지었다. 조선소 설립후 리구리아 최고의 배목수(선공)들이 모여듬
16~17세기
농업, 어업, 해양무역이 성행해서 칭궤테레중 가장 부유한 마을이였음
1815년
제노바공화국이 사르데냐왕국에 합병. 칭궤테레는 지리적으로 격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함
1874년
제노바-라스페지아 철도완성으로 수 세기동안 계속되던 오지상태 벗어남
1997년
유네스코는 베르나짜를 포함한 칭궤테레의 다섯개 마을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
코르니리아
기원전 177년- 한니발과의 전쟁종결
로마인이 한니발격퇴. 리구리아원주민과 동맹군은 삼늄족영토로 추방됨. 전설에 의하면 승자인 로마제국 귀족(Rubra,Vulnetia, Cornelia)들에게 이 영토를 전리품으로 넘겨졌다고함
1244년
코르니리아란 이름이 역사기록에 처음으로 등장
1254년
교황 이노첸지오4세가 피에스키가문에게 코르니리아를 봉토로 넘겨줌
1276년
제노바공화국이 코르니리아를 지배함
1556년
제노바공화국은 적이나 해적의 침입으로 부터 마을을 지키기위해 요새와 성벽을 쌓게함. 마을의 가장높은곳에 요새의 폐허가 남았음
1815년
제노바공화국이 사르데냐왕국에 합병. 칭궤테레는 지리적으로 격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함
1874년
제노바-라스페지아 철도가 완성되어 수 세기 동안 계속되던 오지상태에서 벗어남
1997년
유네스코는 코르니리아를 포함한 칭궤테레의 다섯마을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
마나로라
기원전109년
보라스트라언덕(Volastra)에는 길이 있었는데 이곳의 한 장소에서는 말교환 하던곳이 있었고 최초의 거주지 였다고 함. 후에 이 길은 칭궤테레를 잇는 아우렐리아가도로 변했다.
12세기
보라스트라언덕에 살던 주민들이 바다근처로 옮겼고 여기에 새 거주지를 세움
1244년
역사자료에서 "마나이오라"를 최초로 언급함
1254년
피에스키가문이 군주가되었고 절벽에 세워져있는 보루도 이 가문이 짓게한 요새의 일부분임
1272년
황제권을 옹호하던 세력이 제노바에서 권력쟁취. 피에스키가문 축출당함. 4년 후 제노바공화국의 영토가 되었고 이후 제노바공화국과 운명을 같이함
15- 16세기
사라센 해적들이 자주 침입함
1815년
제노바공화국이 사르데냐왕국에 합병. 칭궤테레는 지리적으로 격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함
1874년
제노바-라스페지아 철도가 완성되어 수 세기동안 계속되던 오지상태에서 벗어남
1997년
유네스코는 마나로라를 포함한 칭궤테레의 다섯 마을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
리오마조레
8세기
한 전설에 의하면 황제 레오네3세 종교박해를 피해 도망한 그리스 망명자들이 몬테로쏘에 도착했고 칭궤테레 해안 여기저기에 소규모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짐
1254년
피에스키가문의 봉토로 됨
1276년
리오마조레는 제노바공화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피에스키가문이 계속다스림.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해상무역이 발달함
1577년
리오마조레에서 와인생산을 많이함
1815년
제노바공화국이 사르데냐왕국에 합병. 칭궤테레는 지리적으로 격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함
1874년
제노바-라스페지아 철도가 완성되어 수 세기동안 계속되던 오지상태에서 벗어남
1997년
유네스코는 마나로라를 포함한 칭궤테레의 다섯 마을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
칭궤테레 해양보호구역: 1997년 12월 12일 문화환경부 규정에 따라 제정되었고, 리오마조레,베르나짜, 몬테로쏘, 레반토일부지역을 포함한다. 해양보호구역 지정은 다음의 2개의 이탈리아 법에 근거를 두고있다: 해양보호규정(1982년 12월 31일 n. 979)과 보호지역 관련규정(1991년 12월 6일 n. 394).
1999년
1999년 10월 6일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령에 따라 칭궤테레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대통령령은 관보1999년 12월 17일자 n. 295호에 공표되었다.
• 칭궤테레 국립공원은 총 4226헥타르에 약 5000명의 인구가 거주함
• 국립공원 범위: 리오마조레 군(카운티)과 그 관할마을인 마나로라, 베르나짜군(카운티)관할의 몬테로쏘 알 마레, 코르니리아, 라스페지아(트라몬티지역), 레반토(메스코지역).
보호 공원 및 해양지역 협회의 구상자, 창설자이자 제 1대 회장은 리오마죠레 출신인 프랑코 보나니니였다.